영화 <오디세이>의 원작 <오디세이아>, 놀란의 영화와 호메로스의 서사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보기 전부터 나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좋아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러 가면서도 한 가지는 미리 생각해 두었다. 이 영화를 원작과 얼마나 똑같이 만들었는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보지는 말자는 것이었다.
<오디세이아>는 짧게 줄거리를 설명하기조차 쉽지 않은 작품이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가 바다를 떠돌며 겪는 사건뿐 아니라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의 이야기, 신들의 개입, 낯선 이를 대하는 고대 그리스의 환대 규범, 인간의 욕망과 실수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겹쳐 있다.
그 방대한 이야기를 약 3시간짜리 영화에 모두 옮기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궁금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놀란은 이 오래된 이야기를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내게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원작과 영화의 차이보다는 바로 그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놀란의 영화에서 가장 오래 남은 장면들
놀란의 <오디세이>에서 좋았던 장면을 꼽으라면 화려한 장면보다 작은 디테일들이 먼저 생각난다.
트로이 목마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 군인들이 그랬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대개 그리스 군이 목마 속에 숨어 트로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는 한 문장으로 지나간다. 그러나 영화는 그 한 문장 속에 실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좁고 어두운 공간에 몸을 구부린 채 오랫동안 꼼짝하지 못했던 병사들이 목마 밖으로 나온 뒤 제대로 걷지 못하고 다리를 절뚝거린다. 아주 작은 장면이지만 나는 오히려 이런 부분에서 놀란 특유의 사실적인 연출을 느꼈다. 신화 속 영웅도 결국 피가 흐르고 다리가 저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평에서도 트로이 목마 장면은 놀란이 이 오래된 이야기를 육체적이고 현실적인 장면으로 바꾸어 놓은 대표적인 시퀀스로 평가됐다.
폴리페모스의 장면도 강렬했다. 폴리페모스는 여러 키클롭스 가운데 오디세우스 일행이 동굴에서 만나는 거인의 이름이다. 오디세우스는 그를 속인 뒤 눈을 멀게 하고 탈출한다. 그런데 폴리페모스가 포세이돈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더욱 험난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영화에서 내게 특히 끔찍하게 남은 것은 폴리페모스의 모습보다 그의 비명이었다. 눈을 잃은 생명체의 고통이 먼저 들려왔다. 놀란의 폴리페모스를 두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로 볼 수 있는지 논의가 나왔다는 점이 흥미롭다.
키르케의 장면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괴했다. 사람의 얼굴을 돼지의 모습으로 빚어내면서 태연하게 흥얼거리던 모습은 잔혹하면서도 묘하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은 연출은 활시위를 튕기는 소리였다.

오디세우스는 사냥하기 전 활시위를 튕겨 사냥감에게 경고를 보내는데 이는 그의 정정당당한 성품을 나타내는 장치다. 현악기의 줄을 강하게 뜯는 소리와 싱크를 맞춰서 독특한 ‘둥~’하는 소리를 몇 번 들려줌으로 관객은 어느새 그 소리를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배경 음악과 함께 나온 이 ‘둥’ 소리가 어찌나 멋지던지! 마치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아이언맨이 손가락을 튕겼던 장면 같았다. 아주 작은 하나의 동작과 하나의 소리가 긴 이야기 전체의 긴장을 한순간에 터뜨린다는 점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내게는 그 한 번의 활시위 소리가 이 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연출 중 하나였다.

무너진 제니아를 보여주는 영화의 방식
원작을 읽은 사람이라면 영화에서 빠진 이야기가 많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처음 영화를 보고 내가 특히 아쉽다고 느낀 부분은 ‘제니아(xenia)’였다.
다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영화가 제니아를 중요하지 않게 다룬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영화는 제우스의 법과 환대의 질서를 상당히 중요하게 다룬다. 오디세우스 역시 자신이 트로이 목마의 계략을 사용하면서 신성한 질서를 무너뜨렸다며 죄책감을 느낀다.
제니아는 흔히 환대 또는 손님과 주인의 우정이라고 번역하지만, 단순히 낯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는 예절보다 훨씬 강한 의미를 지닌다. 낯선 이를 맞아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보호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중요한 의무였고, 제우스는 이 질서를 보호하는 신으로 여겨졌다.
흥미로운 것은 <오디세이아>가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이 질서가 심각하게 무너져 있었다는 점이다. 트로이 전쟁의 발단 자체가 제니아의 위반과 연결되어 있다.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에게 손님으로 환대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주인인 메넬라오스의 아내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로 떠난다. 손님을 보호해야 하는 주인의 의무가 있는 만큼 손님 역시 자신을 환대한 사람을 배신해서는 안 된다. 파리스의 행동은 바로 그 신뢰를 깨뜨린 사건이었다.
따라서 트로이 전쟁을 단순히 한 여자를 둘러싼 전쟁으로만 보면 이 이야기를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다. 고대 그리스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파리스는 한 남자의 아내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신이 보호하는 손님과 주인의 질서까지 어긴 셈이다.
그런 관점에서 놀란의 영화를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처음에 느꼈던 아쉬움도 조금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원작의 <오디세이아>에는 환대와 적대가 끊임없이 교차한다.
나우시카는 난파한 오디세우스를 발견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낯선 남자지만 그를 외면하지 않는다. 파이아케스 사람들은 오디세우스를 씻기고 먹이고 재우며, 결국 그가 이타카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까지 마련해 준다.
아이올로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오디세우스 일행을 한 달 동안 머물게 하며 환대하고, 마침내 고향으로 갈 수 있도록 바람을 가죽 주머니에 담아 건네준다. 원작에서는 아이올로스가 오디세우스를 한 달 동안 대접했다는 내용도 분명하게 나온다.
반대로 폴리페모스는 가장 극단적인 반례다. 자신의 공간에 들어온 이방인을 손님으로 보호하기는커녕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잡아먹는다. 그리고 이타카의 구혼자들 역시 남의 집에서 음식과 재산을 끝없이 소비한다. 손님의 지위를 이용하면서도 손님에게 요구되는 절제와 존중은 지키지 않는다.
<오디세이아>에서는 이렇게 환대를 베푸는 사람과 환대를 파괴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대비된다. 그런데 놀란의 영화에서는 나우시카나 아이올로스처럼 오디세우스에게 선의를 베푸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상당 부분 생략된다. 대신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이 낯선 장소에 도착할 때마다 공격받고 위협당하는 모습이 훨씬 강하게 남는다.
처음에는 이것이 아쉬웠다. 원작에서 제니아는 이미 무너져 버린 법칙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혼란스러워도 여전히 낯선 사람을 보호하는 이들이 있었고, 바로 그 사람들 덕분에 오디세우스는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영화는 어쩌면 의도적으로 제니아의 ‘붕괴’ 쪽에 무게를 둔 것인지도 모른다. 트로이 전쟁에서 시작된 질서의 파괴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가 도착하는 장소마다 환대보다 의심과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문명 세계가 지켜야 할 규칙이 전쟁을 거치면서 무너졌고, 귀향길은 그 무너진 질서 속을 통과하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더 흥미로운 장면이 텔레마코스의 여정이다. 텔레마코스가 메넬라오스를 찾아갔을 때 그는 제대로 된 환대를 받는다. <오디세이아> 원작에서도 메넬라오스는 낯선 두 젊은이를 문밖에서 돌려보내려는 하인의 말을 듣고 화를 내며, 자신들 역시 귀향길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환대를 받았음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텔레마코스와 그의 동행을 궁전 안으로 들여 음식을 제공한다.
이 장면을 오디세우스가 겪는 일들과 나란히 놓으면 의미가 달라진다. 아버지의 세계에서는 제니아가 무너져 있지만 아들의 세계에서는 아직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나우시카와 아이올로스의 환대를 생략한 것이 단순히 러닝타임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환대가 사라진 세계와 아직 환대가 남아 있는 세계를 더욱 선명하게 대비시키기 위한 선택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자 처음에 느꼈던 아쉬움이 오히려 영화에 대한 또 다른 해석으로 바뀌었다. 원작의 <오디세이아>가 “좋은 손님과 나쁜 손님, 좋은 주인과 나쁜 주인”을 반복해서 보여주며 제니아의 의미를 이야기한다면, 놀란의 <오디세이>는 그 가운데에서도 제니아가 무너졌을 때 인간의 세계가 얼마나 위험해지는가를 더 강하게 보여준 작품일지도 모른다.
또 하나 아쉬웠던 것은 아이올로스가 건네준 바람주머니 이야기였다. 바람의 지배자 아이올로스는 오디세우스가 이타카로 돌아갈 수 있도록 불리한 바람을 가죽 주머니 안에 묶어 준다. 오디세우스 일행은 아홉 낮과 아홉 밤을 항해하고 마침내 고향이 눈앞에 보이는 곳까지 도착한다. 너무 지친 오디세우스가 잠든 사이 부하들은 주머니 안에 금과 은 같은 보물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주머니를 열어 버리고, 그 안에 갇혀 있던 바람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눈앞에 두었던 고향은 다시 멀어진다.
나는 원작을 읽으면서 이 장면이 특히 허망했다. 10년에 걸친 귀향에서 오디세우스를 방해하는 것이 언제나 괴물이나 신만은 아니다. 때로는 인간의 의심과 탐욕, 피로와 실수가 더 큰 재앙을 만든다. 거의 도착한 고향을 눈앞에서 잃어버리는 바람주머니 사건은 그래서 오디세우스의 여행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에 이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아쉬웠다. 그러나 동시에 이해할 수도 있었다. 원작은 모두 24권으로 이루어진 긴 서사시다. 약 세 시간의 영화에 모든 섬과 괴물, 신과 인간, 환대와 배신을 전부 담을 수는 없다.
솔직히 욕심을 부리자면 놀란이 <오디세이>를 영화 한 편이 아니라 긴 시리즈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우시카도, 아이올로스도, 원작에서 지나쳤던 수많은 사건도 훨씬 천천히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작품을 여러 편으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막대한 노동과 제작비를 요구할지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영화는 선택해야 한다.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각색은 어쩌면 그 선택의 예술일 것이다.
원작과 달라도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오디세이아>를 오래 좋아했던 사람 가운데 놀란의 영화에 실망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이해한다. 사랑하는 책일수록 머릿속에는 이미 자신만의 영화가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의 모습도, 키르케의 섬도, 폴리페모스의 동굴도 독자의 상상 속에는 이미 존재한다. 여기에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감독에 대한 기대까지 더해졌다면 실제 영화가 그 상상을 모두 만족시키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나 역시 원작을 좋아한다. 하지만 책을 영상으로 옮기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장으로 수십 페이지에 걸쳐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영화는 몇 분 안에 이미지와 소리로 전달해야 한다. 반대로 책에서는 한 문장으로 지나갈 수 있는 사건을 영화에서는 배우와 세트, 의상과 촬영, 음악과 소리로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를 볼 때 원작에 있었는데 무엇이 사라졌는지를 세는 것보다 감독이 무엇을 새롭게 보여주었는지를 보는 편을 택하고 싶다.
<오디세이>는 이전에도 여러 번 영상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번 영화에서 보고 싶었던 것은 단순히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든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였다.
목마 안에서 웅크려 있다가 밖으로 나와 절뚝거리던 군인들, 동굴을 울리던 폴리페모스의 비명, 기괴할 정도로 태연하게 사람을 돼지로 바꾸던 키르케,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극장을 울리던 한 번의 활시위 소리. 그 장면들은 책에서 읽었던 <오디세이아>를 대신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책으로 남아 있고, 내가 좋아했던 나우시카와 바람주머니의 이야기도 그대로 그곳에 있다. 영화는 그 위에 또 하나의 해석을 더했을 뿐이다. 원작을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각색을 원작과 비교해 감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빠진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새롭게 얻은 것을 좋아할 수 있다.
나는 놀란의 <오디세이>를 완벽하게 옮겨진 <오디세이아>가 아니라, 수천 년 전의 이야기를 한 감독이 자신만의 이미지와 소리로 다시 항해해 본 작품으로 기억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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