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도시들 (Invisible Cities)> 이탈로 칼비노

건축사 사무소의 책장을 유심히 들여다본 적이 있다면 묘한 공통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두꺼운 건축 법규집과 오토캐드(AutoCAD) 매뉴얼 사이에, 뜬금없이 이탈리아 소설가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얇은 문학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이 꽂혀 있다는 사실이다.
콘크리트 강도를 계산하고 용적률과 싸우는 도시공학자나 건축가들이, 도면 한 장 들어있지 않은 이 환상 소설을 ‘공간 철학의 바이블’로 떠받드는 이유는 뭘까.
용적률과 평당 단가로 설명할 수 없는 도시의 진짜 얼굴
책의 뼈대는 단순하다. 젊은 여행자 마르코 폴로가 늙은 황제 쿠빌라이 칸에게 자신이 떠돌며 목격한 55개의 제국 도시들에 대해 보고하는 형식이다. 거미줄로 허공에 매달린 도시, 쳐다보는 것만으로 욕망이 복제되는 거울의 도시, 산 자와 죽은 자가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도시 등 기괴하고 아름다운 장소들이 묘사된다.
물론 이 도시들은 실존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마르코 폴로가 묘사하는 55개의 도시는 결국 단 하나의 도시, 자신의 고향 ‘베네치아’를 끝없이 다르게 해체하고 재조립한 환영에 불과하다.
우리는 흔히 도시를 역세권, 8차선 도로, 아파트의 층수로 평가한다. 철저히 물리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잣대다. 하지만 칼비노는 도시를 구성하는 진짜 재료가 콘크리트가 아니라 ‘기억, 욕망, 시선, 그리고 죽음’이라고 말한다. 공간은 단일한 고체 덩어리가 아니라, 그곳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기억과 감정이 거미줄처럼 엉켜 있는 거대한 텍스트라는 것이다.
실무자에게는 쓸모없는, 그래서 가장 필요한 텍스트
솔직히 말해서 당장 꽉 막힌 강남역 사거리의 교통 체증을 해결해야 하는 행정가나 단가를 깎아야 하는 현장 소장에게 이 책을 쥐여주면 헛소리라며 집어던질 확률이 높다.
이 책에는 현대 도시의 주택난이나 인프라 부족을 해결할 실질적인 솔루션이 단 한 줄도 없다. 르 코르뷔지에나 제인 제이콥스의 도시론이 명확한 처방전을 들이민다면, 칼비노의 글은 구름 잡는 소리처럼 시적이고 몽환적일 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쓸모없음’이 이 책의 진짜 가치다. 효율성과 수익성이라는 맹목적인 종교에 빠져 획일적인 아파트와 유리 빌딩만 찍어내는 현대 도시의 천박함을 이토록 우아하게 조롱하는 텍스트는 없다. 책 속의 기괴한 가상 도시들은 놀랍게도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익명성, 소외, 파편화된 대도시의 신경증과 소름 돋게 겹쳐진다.
출근길, 내가 사는 도시를 의심하게 만들다
매일 똑같은 지하철을 타고 똑같은 간판들 사이를 걷다 보면 도시는 그저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 거대한 기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나면 내가 사는 이 건조한 콘크리트 정글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도시란 건축가가 도면으로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나와 당신의 욕망이 매일 새롭게 덧칠하며 완성해 가는 미완성의 유기체다. 설계도와 엑셀 표에 매몰되어 ‘인간’이라는 변수를 잊어버린 모든 공간 기획자들에게, 칼비노는 가장 낭만적이고도 날카로운 회초리를 든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