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과 인간 심리 (The Design of Everyday Things)> 도널드 노먼

지인의 집에 초대받아 주방 찬장을 열려고 할 때의 일이다. 손잡이가 없는 미니멀한 디자인이라 어디를 눌러야 열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엉뚱하게 경첩이 있는 곳을 누르며 헤매다 결국 주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처음 모 회사의 인덕션을 사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매끈한 상판 위에 전원 버튼과 화구 조작부가 숨어 있어, 어느 버튼을 눌러야 어느 화구에 불이 들어오는지 직관적으로 알 수 없어 한참을 쩔쩔맸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흔히 자신의 기계치를 탓하며 자괴감을 느낀다. 하지만 인지과학자 도널드 노먼(Donald Norman)은 명저 <디자인과 인간 심리(The Design of Everyday Things)>를 통해 단호하게 말한다. “바보 같은 사용자는 없다. 바보 같이 설계된 디자인만 있을 뿐이다.”
미니멀리즘의 함정과 어포던스(Affordance)의 부재
최근 유행하는 인테리어나 가전제품을 보면 시각적인 잡동사니를 치우는 미니멀리즘이 대세다. 시각적으로 단순하고 아름다운 것은 좋지만, 일상에서 매일 사용하는 도구라면 무엇보다 효율성과 사용성을 최우선으로 따져야 한다. 노먼은 이를 ‘어포던스(행동 유도성)’라는 개념으로 명쾌하게 설명한다. 사물의 형태 자체가 사용자의 특정 행동을 자연스럽게 유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이나 찬장에 달린 적당한 크기의 손잡이는 ‘이곳을 당기시오’ 혹은 ‘이곳을 잡으시오’라는 무언의 직관적인 신호다. 시각적 단서를 모두 지워버린 평면의 찬장 문은 사용자가 어디를 눌러야 할지 최소한의 단서조차 제공하지 못해 혼란을 야기한다. 밀어야 할 문에 당기기 좋게 생긴 세로형 손잡이를 달아놓아 수많은 사람을 문 앞에서 바보로 만드는 이른바 ‘노먼 도어(Norman Door)’ 현상 역시 이 어포던스의 부재에서 비롯된 전형적인 설계 결함이다.
직관을 배신하는 매핑(Mapping)과 피드백의 실패
기능을 제어하는 스위치와 실제 작동하는 대상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을 책에서는 ‘매핑(자연스러운 대응)’이라고 부른다. 매끈한 인덕션 위에서 화구를 켜지 못해 쩔쩔매는 이유는 이 매핑이 엉망이기 때문이다. 네 개의 화구가 정사각형으로 배치되어 있다면, 조작 버튼 역시 동일한 공간적 배열을 따라야 사용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을 아끼거나 미관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버튼을 일렬로 나열해 버리면, 사용자는 불을 켤 때마다 머릿속으로 버튼과 화구를 매칭하는 인지적 해석 과정을 거쳐야 한다.
또한 시스템은 사용자의 조작에 대해 즉각적인 ‘피드백’을 주어야 한다. 버튼을 눌렀을 때 명확한 소리가 나거나 빛이 들어오지 않으면 사용자는 자신의 행동이 맞았는지 불안해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훌륭한 디자인은 인간의 뇌가 시각적 단서와 공간적 배치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이해하고, 사용자가 무의식적으로 행동해도 오류가 나지 않도록 유도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인간의 오류를 대하는 관대한 시스템
노먼은 인간의 오류를 크게 ‘실수(Slip)’와 ‘착오(Mistake)’로 구분한다. 실수는 목표는 올바르게 설정했으나 무의식적인 행동 과정에서 삐끗하는 것이고, 착오는 상황을 잘못 판단하여 아예 잘못된 목표를 세우는 것이다.
미니멀한 찬장 앞에서 어디를 누를지 몰라 헤맸던 상황은 시각적 단서의 부재가 부른 지각적 착오 환경 탓이며, 인덕션 버튼을 헷갈려 엉뚱한 화구를 켤 뻔한 상황은 나쁜 매핑으로 인한 실수에 가깝다. 훌륭한 디자이너는 인간이 언제든 피곤하거나 부주의할 수 있다는 점을 기본 전제로 깔고, 사용자가 오류를 범하더라도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게 하거나(제한 기능), 쉽게 원래 상태로 되돌릴 수 있는 ‘복구 가능성’을 설계에 포함해야 한다.
물리적 세계를 넘어선 UX 디자인의 바이블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된 지 수십 년이 흘렀고, 책에 등장하는 사례의 상당수는 물리적인 기계 장치나 아날로그 제품에 머물러 있다. 스마트폰과 터치 인터페이스가 지배하는 현대의 독자에게는 슬라이드 영사기나 구형 전화기 같은 예시가 다소 낡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현대 IT 업계와 UX/UI 디자이너들에게 변함없는 바이블로 추앙받는 이유는 뚜렷하다.
디자인의 매체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스크린으로 변했을지언정, 정보를 처리하는 ‘인간의 심리와 인지 구조’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버튼의 물리적인 클릭감을 화면 속 애니메이션 진동 피드백으로 대체하고, 물리적 스위치의 배열을 웹사이트의 내비게이션 메뉴 구조로 치환하면 책이 제시하는 모든 원칙은 현대의 앱과 웹 서비스 위에서도 소름 돋도록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인간을 향한 디자인의 본질을 묻다
훌륭한 디자인은 사용자가 설명서를 읽지 않고도 본능적으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미니멀리즘이라는 껍데기에 취해 직관적인 사용성을 포기한 디자인은 결국 도구로서의 본질을 잃어버린 허영심의 산물일 뿐이다.
책을 덮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해상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더 이상 헷갈리는 문 앞에서, 혹은 복잡한 가전제품 버튼 앞에서 스스로의 지능을 탓하며 위축될 필요가 없다. 이 책은 일상의 사소한 불편함을 인지과학의 렌즈로 집요하게 해부하며, 기술과 미학이 철저히 인간의 심리를 딛고 서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날카로운 진리를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