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위한 디자인 (Design for the Real World)> 빅터 파파넥

인스타그램 광고 속에서 깔끔한 디자인을 뽐내던 탁상용 미니 청소기에 홀려 결제를 누른 적이 있다. 슬림한 디자인은 책상 위 어디에 두어도 인테리어 소품처럼 근사해 보였다. 하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필터 청소는 까다로웠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기능인 ‘흡입력’이 엉망이었다. 1년도 채 쓰지 못하고 결국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직행하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보기에만 번지르르한 예쁜 쓰레기’에 속지 않으려면 청소기 같은 실용 가전은 무조건 대기업 제품(삼*, L*, 다*슨)을 사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명품의 세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는 지인은 “세상에서 제일 비싸고 화려한 예쁜 쓰레기의 정점은 다름 아닌 에르*스 버*백”이라고 혀를 내두른 적이 있다.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막상 써보면 가방을 열고 닫는 구조가 지독하게 불편한 데다, 물건을 몇 개 넣지 않아도 가방 자체의 무게 때문에 반나절만 들고 다녀도 팔이 뻐근해진다는 것이다.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의 1970년 고전 <인간을 위한 디자인(Design for the Real World)>은 바로 이 ‘예쁜 쓰레기’를 향한 인류 역사상 가장 매섭고 통쾌한 일갈이다.
“살인 다음으로 위험한 직업, 그것은 디자이너다”
책의 서문은 섬뜩할 정도로 도발적이다. 파파넥은 디자이너들을 향해 지구를 오염시키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데 앞장서는 가장 해로운 직업군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과격하게 들리지만 그가 해부한 70년대 자본주의 시스템을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시 산업 디자인의 목표는 제품의 본질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구형 모델을 촌스러운 쓰레기로 보이게 만드는 ‘계획적 진부화’에 맞춰져 있었다. 차 성능과는 아무 상관 없는 거대한 자동차 꼬리 날개나, 한 시즌 지나면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유행 타는 패키지들이 쏟아졌다. 디자이너들은 대중의 허영심을 자극해 기업의 지갑을 불리는 화려한 사기꾼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 사이 정작 디자인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한 장애인, 노약자, 제3세계의 빈민들은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철저히 배제되었다. 파파넥의 비판은 단순히 물건의 모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업주의에 영혼을 판 디자인계 전체의 윤리적 기만에 대한 고발이었다.
본질을 잃어버린 예쁜 쓰레기들을 향한 경고
그렇다면 파파넥이 제안하는 ‘진짜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철저하게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투박하지만 강인한 디자인이다.
책에 등장하는 사례들은 놀랍다. 그는 깡통과 파라핀 왁스 등을 이용해 개발도상국 오지에서 백신과 식량을 보관할 수 있는 9센트짜리 라디오와 무동력 냉장고를 고안해 냈다. 미학적으로는 보잘것없는 고철 덩어리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화려한 버킨백이나 인스타 감성의 미니 청소기가 절대 해낼 수 없는 일, 즉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일상의 불편을 해결하는 디자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한다.
파파넥은 디자인 과정에서 재활용 가능성과 에너지 효율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현대의 ‘친환경 생태 디자인’ 개념을 반세기나 앞서 제시했다. 눈앞의 매출을 위해 지구의 자원을 탕진하는 인공물은 결국 인간의 생존을 위협할 것이라는 그의 경고는, 기후 위기를 맞은 오늘날 섬뜩한 예언으로 다가온다.
팔리는 물건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묻다
물론 파파넥의 해결책은 소규모 공동체를 위한 게릴라성 프로젝트에 가까워 거대한 자본주의 시스템을 엎기엔 다소 이상적이고 낭만적인 한계도 지닌다. 하지만 시중에 널린 뻔한 실무 서적들이 “어떻게 하면 더 세련되게 포장해서 소비자의 지갑을 열까(How)”를 고민할 때, 이 책은 유일하게 “우리는 왜 디자인을 해야 하는가(Why)”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디자인은 물건을 치장하는 포장지가 아니라, 세상을 나아지게 만드는 도구여야 한다. 예쁜 쓰레기에 속아 지갑을 열고 헛헛해해 본 적이 있는 소비자라면, 그리고 이 거대한 소비의 쳇바퀴 속에서 묘한 회의감을 느끼는 기획자나 디자이너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윤리적 지침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