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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공간 (Mensch und Raum)>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브

읽는 시간 약 5분
raum

요즘 사람들에게 집은 ‘평당 얼마짜리 자산’이거나, 밖에서 에너지를 다 쓰고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는 여관’ 둘 중 하나로 전락해 버렸다. 독일의 철학자 오토 프리드리히 볼노브(Otto Friedrich Bollnow)의 1963년 저작 <인간과 공간(Mensch und Raum)>은 현대인들의 이 얄팍하고 기능적인 공간관에 묵직한 돌직구를 던지는 책이다.

그는 마르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를 빌려와, 집이 단순한 물리적 구조물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의 무질서와 폭력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버티게 해주는 최후의 보루라고 선언한다.

부동산이 아닌 실존의 닻을 내리는 행위

볼노브에게 ‘거주한다’는 것은 단순히 비바람을 피하고 밥을 먹는 생물학적 생존이 아니다. 험난하고 예측 불가능한 바깥세상(세계)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고요하고 안전한 중심축을 내면에 세우는 일이다. 무한하고 차가운 우주적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안전한 ‘나만의 세계’를 구획하는 행위. 집이라는 닻이 없다면, 인간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바다를 평생 불안하게 떠도는 난파선에 불과하다.

사소한 건축 요소에 깃든 서늘한 철학

이 책의 진짜 묘미는 거창한 건축 이론이 아니라 문, 창문, 침대 같은 지극히 평범한 방구석의 요소들을 인간 실존의 도구로 잔인할 만큼 날카롭게 해체하는 데 있다.

  • 침대: 피로를 푸는 단순한 가구가 아니다. 하루 종일 쓰고 있던 사회적 가면을 벗어던지고 가장 원초적이고 무방비한 자아로 퇴각하는 은신처다. 우리는 매일 밤 잠들며 죽음을 경험하고 아침에 다시 태어나는 ‘실존적 부활’을 이 제단 위에서 겪는다.

  • 창문: 완벽하게 안전한 방 안에 웅크린 채로, 바깥세상의 무한함과 교감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각적이고 영적인 통로다.

  • 문: 외부의 폭력을 차단하는 든든한 방어벽이자, 오직 내가 원할 때만 세상과 접속하겠다는 주도권을 쥐여주는 권력의 경계선이다.

내가 차 문을 닫으며 느끼는 압도적인 해방감

볼노브의 통찰 중 내게 가장 소름 돋게 와닿은 건 다름 아닌 ‘문’에 대한 해석이었다. 일상에서 내가 실존적 안도감과 통제권을 가장 뼈저리게 감각하는 대상이 바로 문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온갖 소음과 타인의 요구에 시달리다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닫는 순간, 그리고 내 방에 들어와 방문을 닫는 순간 찾아오는 그 묵직한 안도감을 떠올려 보라. 특히 내가 이 공간의 완벽한 통제자임을 느끼는 순간은 따로 있다. 바로 혼자 자동차 운전석에 올라타 차 문을 육중하게 탁 닫을 때다.

문이 닫히는 그 짧은 파찰음과 함께 바깥세상과의 연결은 완전히 단절된다. 이제 이 좁은 철제 공간 안에 남은 건 오직 나 하나뿐이며, 핸들과 페달을 쥔 나는 이 움직이는 방을 완벽하게 통제한다. 누구도 내 허락 없이 이 공간에 침입할 수 없다는 절대적인 감각. 볼노브가 말한 ‘나를 지켜주는 경계선’이자 ‘통제권의 상징’으로서의 문이 무엇인지, 나는 매일 차 문을 닫으며 뼈저리게 감각한다. 문을 닫음으로써 비로소 나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분리해 내고 온전한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난해함을 방구석으로 끌어내리다

공간 철학의 또 다른 고전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공간의 시학>이 몽환적이고 다분히 시적인 상상력에 기대고 있다면, 볼노브의 책은 훨씬 뼈대가 굵고 현상학적이다. 자칫 기괴하고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릴 수 있는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개념들을 ‘지붕’, ‘문고리’, ‘벽’ 같은 일상의 언어로 빈틈없이 번역해 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압도적인 가치를 지닌다.

물론 요즘 유행하는 얕고 빠른 지식을 떠먹여 주는 실용서나 힐링 에세이에 익숙해져 있다면 첫 장부터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철학적 사유의 밀도가 워낙 높아, 문단 하나를 읽고 내 방의 방문과 창문을 한참 노려봐야 하는 묵직한 지적 피로감이 동반된다.

당신은 진정으로 ‘거주’하고 있는가

우리는 돈을 주고 공간의 소유권을 쥐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 그 공간이 우리의 내면과 삶의 방식을 주조하고 있다. 아파트의 자산 가치 상승에만 눈이 멀어 정작 자신이 매일 숨 쉬고 잠드는 공간과는 정서적으로 철저히 단절되어 버린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잃어버린 ‘진정한 거주의 감각’을 되찾으라고 서늘하게 경고한다.

재테크 서적을 덮고 오늘은 이 책을 펼쳐보자. 그리고 당신이 지금 머물고 있는 방을 찬찬히 둘러보라. 당신의 방에서 당신에게 가장 완벽한 ‘실존적 안도감’을 주는 사물은 무엇인가? 세상의 거친 파도로부터 당신을 지켜주는 단단한 닻은 과연 당신의 공간 어디에 내려져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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