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의 형태 공간 규범> 프랜시스 D.K. 칭

설계 스튜디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프랜시스 칭(Francis D.K. Ching)의 《건축의 형태, 공간, 질서(Form, Space, and Order)》는 솔직히 말해 처음엔 고역이었다.
신입생 시절 선배들이 “이건 그냥 바이블이니까 묻지 말고 사라”고 해서 샀지만, 막상 펼치면 깨알 같은 손글씨 폰트와 흑백 드로잉만 빼곡했다. 화려한 렌더링 이미지나 스타 건축가의 인터뷰집을 기대했던 내게는 그저 두껍고 건조한 기하학 교과서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책의 진짜 무게감은 마감 전날 밤을 새우며 콘셉트가 막혀 벽에 부딪힐 때 드러난다.
머릿속 생각을 도면으로 옮기지 못할 때 벌어지는 일
학생들이나 주니어 디자이너가 가장 자주 겪는 문제는 머릿속에 그럴듯한 공간감이 있는데 이걸 평면도나 단면도로 구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대충 이런 느낌의 열린 공간”이라고 얼버무리다 크리틱 때 교수나 사수에게 밑천이 털리기 십상이다.
프랜시스 칭은 이 모호함을 점, 선, 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단위로 잔인할 만큼 해체해 버린다.
-
점 하나: 바닥에 기둥 하나를 박는 순간 그 자리가 축이 되고 고유한 영역이 생긴다.
-
선과 면: 벽을 30cm 띄우느냐 완전히 붙이느냐에 따라 동선이 관통할지 차단될지가 갈린다.
-
비움(Void)의 볼륨: 벽돌을 쌓는 게 건축이 아니라, 벽돌 사이의 ‘비어 있는 공기’를 어떻게 조각하느냐가 본질임을 직관적인 스케치로 짚어낸다.
화려한 말장난이나 거창한 철학 담론 없이, 오직 손으로 그린 다이어그램 하나로 “네가 지금 막힌 이유는 평면의 축(Axis)과 동선의 위계(Hierarchy)가 충돌했기 때문”이라고 급소를 찌르는 식이다.
이 책이 여전히 위험한 이유, 그리고 한계
물론 이 책을 맹신하면 함정에 빠진다.
-
지나치게 고전적이고 기하학 중심적이다.
요즘 실무에서 다루는 비정형 파라메트릭 디자인, 친환경 에너지 설비, 복잡한 건축법규나 공사비 절감 같은 ‘진짜 현실’은 단 한 줄도 다루지 않는다. 책만 보면 세상 모든 건물이 정갈한 정육면체와 완벽한 황금비 속에서만 숨 쉬는 것 같다.
-
친절한 해설서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책이라기보다, 아이디어가 막힐 때 아무 페이지나 툭 펼쳐서 형태적 실마리를 훔쳐보는 ‘형태 사전’에 가깝다. 처음부터 정독하려 들면 지루해서 30페이지도 못 넘기고 덮기 십상이다.
화려한 준공 사진보다 강력한 선 하나
자하 하디드나 렘 콜하스의 작품집은 보는 순간 압도되지만, “그래서 내 프로젝트에 당장 뭘 어떻게 쓰라는 거지?”라는 질문에는 답을 주지 않는다. 반면 프랜시스 칭의 스케치는 철저하게 ‘내가 직접 연필을 쥐고 선을 긋는 방법’을 가르친다.
출간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책이지만 여전히 손이 닿는 자리에 꽂아두는 이유는 단순하다. 디자인의 겉멋을 걷어내고, 내가 만들려는 공간의 뼈대가 논리적으로 서 있는지 자문할 때 이만큼 냉정하게 기본기를 점검해 주는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