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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 (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 로버트 벤투리

읽는 시간 약 6분
robventuri

“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Less is more).”

건축이나 공간 디자인에 조금이라도 발을 걸쳐본 사람이라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격언이다.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을 지배한 이 절대 교리는 ‘장식은 곧 죄악’이라 여기며, 오직 기능만을 남긴 채 유리와 철골로 매끈한 상자를 뽑아내는 데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1966년,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Robert Venturi)는 이 숨 막히는 순수주의의 한복판에 정면으로 침을 뱉는다. 그의 저서 《건축의 복합성과 대립성(Complexity and Contradiction in Architecture)》은 “적은 것은 지루할 뿐이다(Less is a bore)”라고 맞받아치며, 획일적인 모더니즘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국내에는 2004년에야 번역 출간되었고 현재는 절판되어 헌책방을 뒤져야만 겨우 구할 수 있는 책이지만, 이 도발적인 텍스트가 건축계에 남긴 흉터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거대한 사조로 지금까지 뚜렷하게 남아있다.

순수한 형태라는 이름의 오만한 폭력

모더니즘은 확실히 효율적이었다. 하지만 지루하고 차가웠다. 주변 골목의 역사적 맥락이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다소 촌스러운 개인적 취향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오직 ‘기능과 합리성’이라는 단일 논리로 도시를 표백해 나가는 오만함에 대해 벤투리는 급제동을 건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현실은 수학 공식처럼 딱 떨어지지 않는다. 역사적 기억, 모순되는 인간의 욕망, 이율배반적인 필요가 지저분하게 뒤엉켜 있는 것이 진짜 삶이다. 벤투리는 건축이 이러한 ‘복합성과 대립성’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기꺼이 껴안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능에 형태를 억지로 끼워 맞추는 완고한 강박에서 벗어나, 매끈하고 뻔한 공간 대신 중의적이고 모순적인 해석이 가능한 틈을 열어두라는 것이다.

논밭 한가운데서 마주한 ‘모순과 복합’의 묘한 위안

벤투리가 옹호했던 이 알록달록한 모순의 매력은 굳이 건축사전에 나오는 유명한 건물을 찾지 않아도 일상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김포의 외진 길을 지나다 보면, 주변에 휑한 논밭밖에 없는데 정말 뜬금없이 덩그러니 서 있는 건물 하나가 있다. 놀랍게도 양식/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내부 공간은 더 가관이다. 한가운데는 벽난로, 한쪽 구석에는 낡은 업라이트 피아노와 통기타가 무심하게 놓여 있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마른꽃과 생화, 출처를 알 수 없는 빈티지 식기류들이 여기저기 엉켜 전시되어 있다. 심지어 천장에는 조화로 만든 커다란 원형 리스가 매달려 있다. 테이블의 크기나 그 위에 덮인 식탁보의 패턴, 의자의 모양새도 통일된 것 없이 죄다 제각각이다.

요즘 유행하는 인스타그램 감성의 미니멀리스트 디자이너가 보았다면 당장 다 내다 버리라며 기겁을 할 혼종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논리적인 통일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 난해한 공간이 주는 묘한 아늑함이 있다. 훌륭한 음식 맛도 한몫했겠지만, 무엇보다 그 제각각인 잡동사니들이 뿜어내는 어설프고 사람 냄새 나는 모순들이 획일화된 프랜차이즈 식당의 매끈함보다 훨씬 더 마음을 편안하게 무장해제 시킨다.

모든 요소가 제각각 떠들며 대립하는 듯하지만, 그 이질적인 것들이 얽혀 오히려 풍부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곳. 벤투리가 “적은 것은 지루하다”며 주장했던 복합성의 미학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folk edited

어설프게 베껴 쓰다 조잡해진 후대들의 키치(Kitsch)

물론 벤투리의 이론을 실무에 적용한 1세대 건축물들은 당시 대중에게 묘한 불쾌감과 호기심을 동시에 유발했다. 정면은 웅장한 고전주의 대저택인데 옆으로 돌면 얄팍한 합판 쪼가리처럼 보이게 하거나, 구조적으로 아무 쓸모가 없는 거대한 기둥을 버젓이 세워두는 식이었다. 이는 규격화된 유리 상자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 “대체 건물이 왜 이 모양이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치밀하게 계산된 지적인 낯섦이었다.

하지만 이 파격은 이내 뼈아픈 부작용을 낳았다. 벤투리의 철학을 피상적으로만 베낀 3류 건축가들이 얄팍한 상업 자본과 결탁하기 시작한 것이다. 맥락도 없는 서양식 기둥을 외벽에 턱턱 갖다 붙이거나, 요란한 웨딩홀식 장식만 덕지덕지 발라놓은 조잡한 상가 건물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고도의 지적 계산 아래 통제되어야 할 ‘복합성’이, 그저 산만하고 저렴한 키치(Kitsch)로 전락해버린 현상.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 겪어야 했던 비극적 결말이다.

유리 상자에 지친 이들을 위한 철학적 해독제

오늘날의 도시는 어떨까. ‘스마트 시티’나 ‘친환경 랜드마크’라는 새로운 명분을 앞세워, 여전히 통제하기 쉽고 관리하기 편한 매끈한 유리 상자들을 끊임없이 찍어내고 있다. 효율성과 시각적 질서라는 이름 아래, 공간이 품을 수 있는 혼란스럽지만 다채로운 인간적 매력들은 거세당하는 중이다.

절판된 책을 중고로 비싸게 구해서라도 벤투리를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완벽하게 정돈된 미니멀리즘이 주는 얄팍하고 서늘한 평온함 대신, 다소 촌스럽고 억지스러우며 모순적일지라도 ‘풍부한 텍스트와 사람의 체온을 품은 공간’이 인간에게 왜 필수적인지 이 책만큼 지적으로 옹호해 주는 텍스트는 드물기 때문이다. 매끈하게 표백된 현대 도시에 지쳐 삶의 복잡한 냄새가 그리워진다면, 벤투리의 유쾌한 독설이 완벽한 해독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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