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건축 (L’architettura della città)> 알도 로시

한국의 도시는 끊임없이 부수고 새로 짓는 거대한 공사장이다. 낡은 것은 일단 포크레인으로 밀어버리고 번쩍이는 유리 타워와 아파트 단지를 세우는 게 최고의 미덕인 세상에서, 이탈리아 건축가 알도 로시(Aldo Rossi)가 1966년에 쓴 <도시의 건축(L’architettura della città)>은 지극히 불온하고 반항적인 텍스트다.
이 책은 한국에서 2003년 출판사 ‘동녘’을 통해 번역 출간되었으나 지금은 절판되어 헌책방을 뒤져야 겨우 구할 수 있다. 하지만 효율성과 수익성이라는 이름의 재개발 광풍이 휩쓰는 지금이야말로, 이 낡은 책의 먼지를 털어내고 그 서늘한 경고를 마주해야 할 때다.
기능은 변하지만, 형태는 살아남는다
모더니즘의 맹신도들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고 떠들며 도시를 효율적인 기계 장치로 개조하려 했다. 로시는 이 얄팍한 공식을 정면으로 박살 낸다. 기능을 위해 형태가 존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형태 자체가 기능보다 훨씬 질기게 살아남아 도시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적 무기인 ‘유형학(Typology)’은 현실에서 명확히 증명된다. 오래된 화력발전소가 현대미술관(테이트 모던)이 되고, 버려진 공장과 창고가 힙한 카페나 로프트 주거지로 변모하는 것을 보라. ‘기능’은 자본의 논리와 시대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갈아 끼워지지만, 인류가 축적해 온 공간의 뼈대와 형태적 원형은 끝까지 살아남아 도시의 맥락을 쥔다. 로시에게 도시는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유기체가 아니라, 인간의 끈질긴 의지와 역사가 켜켜이 쌓여 굳어진 거대한 ‘인공물’이다.
포크레인이 밀어버리는 것은 건물이 아니라 ‘기능하는 뇌세포’다
낡은 건물을 싹 밀어버리고 최첨단 스마트 시티를 세웠을 때 우리가 느끼는 묘한 삭막함과 공허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로시는 이를 ‘집단 기억(Collective Memory)’의 증발로 설명한다.
도시는 그저 부동산과 콘크리트의 집합이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이 엉겨 붙은 무대다. 오래된 광장, 굽어진 골목, 쓸모없어 보이는 역사적 기념물들은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다. 사람들이 시간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꽉 붙잡아주는 ‘물리적인 닻’이다. 수익성과 용적률만 따지며 기억의 공간을 함부로 지워버리는 행위는, 곧 도시가 가진 역사적 연속성의 뇌세포를 파괴하는 것과 같다.
불친절한 텍스트가 던지는 지적인 쾌감
물론 이 책을 읽는 건 상당한 고역이다. 로시의 문체는 지독하게 건조하며, 유럽 건축사와 지리학, 사회학을 넘나드는 방대한 통찰은 독자의 얕은 밑천을 가차 없이 시험한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도시 재생 매뉴얼이나 실무적인 디자인 지침 따위는 단 한 줄도 없다.
하지만 르 코르뷔지에가 낡은 도시를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십자형 고층 빌딩을 꽂으려 했던 ‘폭력적인 미래’에 질렸다면, 반대로 제인 제이콥스가 찬양한 ‘골목길과 보행자의 활력’만으로는 거대 도시의 구조적 뼈대를 설명하기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면, 이 책은 그 틈을 메워주는 완벽한 해독제가 된다.
절판된 지 오래인 이 불친절한 책을 굳이 찾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막대한 자본만 쏟아부으면 하루아침에 랜드마크와 핫플레이스를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천박한 도시 기획자들에게, 도시란 얄팍한 기획이 아니라 ‘축적된 시간의 뼈대’로만 유지된다는 진실을 이토록 묵직하게 증명한 책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