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장소 (Space and Place)> 이 푸 투안

강원도 어딘가에 주변 상가도, 화려한 조명도 없는 휑한 바닷가가 하나 있다. 처음 그곳에 갔을 때는 그저 모래와 바닷물만 있는 심심한 곳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모래사장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가족들과 캄캄한 밤하늘의 별을 본 적이 있다.
그날 이후, 그 텅 빈 바닷가는 우리 가족에게 가장 애틋한 목적지가 되었다. 굳이 별이 보이지 않는 날에도 상관없다. 어둠 속에서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배경 삼아, 돗자리에 누워 두런두런 가족들의 이야기 소리를 듣다 보면 지도상의 무의미한 점 하나가 완벽한 ‘우리만의 구역’으로 변하는 것을 느낀다.

인문지리학의 거장 이 푸 투안(Yi-Fu Tuan)의 고전 <공간과 장소(Space and Place)>는 바로 이 개인적이고 마법 같은 변화를 학문적으로 명쾌하게 해부한 책이다.
텅 빈 ‘공간’이 온기를 품은 ‘장소’가 될 때
이 책의 뼈대는 제목 그대로 ‘공간(Space)’과 ‘장소(Place)’를 구분하는 데서 출발한다.
투안의 정의에 따르면, ‘공간’은 추상적이고 낯설며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열린 영역이다. 반면 ‘장소’는 인간이 그곳에 머물며 특정한 경험과 기억, 그리고 감정을 덧칠해 의미를 부여한 구역이다. 강원도의 그 바닷가는 처음엔 누구에게나 똑같이 광활한 ‘공간’이었지만, 가족과의 시간과 파도 소리가 축적되면서 비로소 대체 불가능한 ‘장소’로 태어난 것이다.
우리가 낯선 여행지에 처음 도착했을 때 느끼는 감정은 공간의 개방감이 주는 자유로움(혹은 두려움)이다. 하지만 그곳의 단골 카페가 생기고 골목길이 익숙해지면, 그 공간은 점차 나에게 친숙한 장소로 성질을 바꾼다. 투안은 이처럼 인간이 물리적 환경과 교감하며 애착을 형성하는 과정을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인 시선으로 집요하게 추적한다.
현대 도시가 앓고 있는 ‘장소 상실’의 병
이 책의 통찰이 무거운 이유는, 오늘날의 도시가 자본과 효율성의 논리로 거대한 ‘공간’만 찍어낼 뿐 의미 있는 ‘장소’의 탄생은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나 똑같은 평면도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골목의 고유한 풍경은 복제된 프랜차이즈 상점들로 덮인다. 투안은 이를 ‘장소 상실(Placelessness)’이라고 진단했다. 규격화되고 무균질한 환경에서는 개인의 고유한 기억이나 애착이 뿌리내리기 어렵다. 재개발로 옛 동네가 싹 밀려나가고 번쩍이는 새 빌딩이 들어섰을 때, 우리가 묘한 상실감과 소외감을 느끼는 이유는 건물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내 삶이 얽혀 있던 ‘장소’가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실용서는 아니지만, 시야를 완전히 뒤집는 텍스트
케빈 린치가 <도시의 이미지>에서 도시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인지하는지 분석했고, 제인 제이콥스가 보행자 거리의 활력에 집중했다면, 이 푸 투안의 시선은 훨씬 내밀하고 근원적이다.
물론 이 책은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도시 계획 매뉴얼이나 실용서가 아니다. 현상학적 사유가 짙게 깔려 있어 가볍게 술술 읽히는 편도 아니다. 서구 중심의 사례나 추상적인 개념 전개 때문에 어떤 대목은 두어 번씩 곱씹어 읽어야 하는 수고로움도 따른다.
그럼에도 이 책이 지닌 가치는 조금도 퇴색되지 않는다. 책장을 덮고 나면 매일 오가는 출근길, 동네의 작은 공원, 심지어 내 방 안의 책상까지도 단순한 물리적 면적이 아니라 ‘나의 시간이 축적된 밀도 높은 장소’로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속도와 개발만이 미덕이 된 세상에서, 인간을 진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은 웅장한 건축물이 아니라 한 뼘이라도 내 기억과 애정이 깃든 장소임을 이 책은 가장 지적인 언어로 증명해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