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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 (Palaces for the People)> 에릭 클라이넨버그

읽는 시간 약 4분
palaces

아파트 현관문을 닫는 순간 완벽한 고립이 시작되는 시대. 우리는 이웃의 얼굴조차 모른 채 각자도생을 외치며 살아간다.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도시는 어떻게 삶을 바꾸는가(Palaces for the People)》는 이런 현대 도시의 서늘한 풍경에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개인의 노력이나 재력만이 진짜 안전을 보장할 수 있을까. 저자는 흔히 예산 낭비나 복지용 시설로 치부되는 도서관, 공원, 동네 카페 같은 ‘사회적 인프라’가 실제로는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가장 강력한 방패라고 주장한다.

시카고 폭염 사태가 남긴 명확한 증거

이 책의 주장을 가장 선명하게 뒷받침하는 것은 1995년 여름 미국 시카고를 강타한 폭염 사태다. 일주일 만에 700명 이상이 사망한 재난 속에서, 소득 수준과 인구 구성이 거의 비슷한 두 이웃 동네의 생존율은 극명하게 갈렸다. 차이를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동네의 풍경’이었다.

사망자가 적은 지역은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상점 주인이 이웃의 안부를 묻는 활기찬 곳이었다. 반면 피해가 컸던 지역은 우범 지대라 사람들이 외출을 꺼리고 철저히 단절된 곳이었다. 평소에 촘촘하게 엮여있던 사회적 연결망이, 폭염이라는 비상사태에서 고립된 노인들의 안부를 확인하고 안전한 장소로 이끄는 거대한 생존망으로 작동한 것이다.

선의가 아니라 물리적 공간이 연대를 만든다

우리는 흔히 팍팍한 인심을 탓하지만, 사회적 자본은 사람들의 선의만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동네에 머물 공원이나 안전한 보행로가 없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각자의 방에 갇힌다.

책에서 가장 큰 찬사를 보내는 공간은 ‘공공도서관’이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빌리는 곳이 아니다. 아이, 노인, 이민자, 심지어 홈리스까지 누구나 돈을 내지 않고도 쫓겨나지 않으며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민주적 공간이다. 경제적 효율성만 따지며 이런 공공장소를 없애고 수익성 건물을 올리는 것은,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도시 스스로 면역력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기후 위기 시대, 국가보다 빠른 것은 이웃이다

기후 위기가 일상이 된 지금, 재난은 늘 약자부터 덮친다. 에어컨이나 자동차가 없고 재난 정보를 늦게 접하는 이들에게 국가의 공공 구조대는 항상 한발 늦는다.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을 강타했을 때 가장 먼저 서로를 구하고 대피소를 만든 것은 평소 동네 커뮤니티 센터나 도서관에서 얼굴을 익힌 이웃들이었다.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만큼이나 이웃과 연결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에 투자하는 것이 도시의 회복력을 결정짓는 핵심이다.

다른 도시론과의 비교, 그리고 아쉬운 점

제인 제이콥스의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이 보행자 중심 거리의 가치를 인류학적 직관으로 포착해 낸 에세이라면, 클라이넨버그의 책은 이를 현대적인 통계와 데이터로 증명한 실질적 정책 보고서에 가깝다. 또한 로버트 퍼트넘이 《나 홀로 볼링》에서 미국 사회의 붕괴를 우울하게 진단했다면, 이 책은 물리적 공간의 복원이라는 보다 구체적이고 희망적인 해법을 내놓는다.

물론 한계도 있다. 넒은 공원과 도서관 중심의 미국 대도시 사례를, 고도로 밀집된 아파트 단지 위주의 한국 메가시티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다소 이질감이 든다. 게다가 천문학적인 땅값과 예산 부족을 핑계로 대는 지자체를 설득할 만한 날카로운 재정적 대안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상적인 비전을 현실의 행정에 어떻게 관철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당신은 어떤 도시에서 살고 싶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덮고 나면 매일 스쳐 지나가던 낡은 동네 도서관과 벤치가 전혀 다르게 보인다. 그곳은 단순한 휴식처가 아니라, 도시가 무너지지 않게 버티고 있는 튼튼한 신경망이다.

철저히 고립된 채 각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칠 것인가, 아니면 서로를 느슨하게 연결해 주는 공공의 거실을 곁에 두고 안심하며 살 것인가. 도시의 미래와 우리의 안전을 묻는 이 책의 질문은 차갑고도 명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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