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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짓기와 거주하기 (Building and Dwelling)> 리처드 세넷

읽는 시간 약 5분
sennett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 한 곳에는 덩그러니 방치된 정체불명의 건물이 하나 있다. 애초에 시공사는 입주민을 위한 우아한 ‘티 하우스’를 만들겠다며 번듯하게 외관을 지어 올렸다.

그런데 막상 건물을 완성하고 보니 내부 크기가 너무 애매했다. 음료를 만들 주방과 카운터를 집어넣고 나면, 정작 거주민들이 앉아서 담소를 나눌 테이블은 고작 두세 팀 분량도 나오지 않을 견적이 나온 것이다. 결국 그 누구도 운영을 맡지 못한 채, 이 공간은 현재 아무런 쓰임새 없이 문이 굳게 잠겨 있다. 그 앞을 지나칠 때마다 거창한 조감도에 속은 것 같아 실소가 터져 나오곤 한다.

이 텅 빈 건물은 현대 도시 계획이 얼마나 책상머리에서 단편적으로 이루어지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축소판이다. 도시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의 《짓기와 거주하기(Building and Dwelling)》는 바로 이 어처구니없는 촌극이 왜 전 세계 도시 곳곳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지 묵직하게 해부하는 고전이다.

‘빌(Ville)’의 오만과 ‘시테(Cité)’의 실종

세넷은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언어로 프랑스어인 ‘빌(Ville)’과 ‘시테(Cité)’를 꼽는다.

  • 빌(Ville): 건축가와 행정가들이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지어 올리는 ‘물리적인 도시’다. 도로망, 아파트 단지의 배치, 건물의 외관 등 지도 위에 그려지는 하드웨어다.

  • 시테(Cité): 그 물리적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부딪히고, 관계를 맺고, 일상을 영위하며 만들어가는 ‘삶의 방식’이자 소프트웨어다.

아파트 단지의 티 하우스가 참담하게 실패한 이유는 철저하게 ‘빌’의 관점에서만 공간을 기획했기 때문이다. 도면 위에 네모난 건물을 그려 넣고 ‘티 하우스’라는 간판만 달면(짓기), 사람들이 알아서 모여 차를 마실 것(거주하기)이라는 오만한 착각의 결과물이다. 공간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동선을 짜고, 몇 명이 모여야 생기가 도는지에 대한 ‘시테’의 이해가 철저히 결여된 것이다. 세넷은 이처럼 현대 도시가 완벽한 ‘빌’을 구축하려다 살아 숨 쉬는 ‘시테’를 압살해버리는 부조리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닫힌 도시가 만들어내는 숨 막히는 완벽함

저자는 르 코르뷔지에 같은 과거의 모더니즘 건축가들이 꿈꿨던 효율적인 마스터플랜부터, 오늘날 모든 것이 통제되는 최첨단 스마트 시티에 이르기까지 현대 도시가 점점 ‘닫힌 체계(Closed System)’로 변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닫힌 체계 속에서 도시는 사용자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비효율적이거나 지저분한 것들은 치워버리고, 오직 설계자의 의도대로만 움직이기를 강요한다. 철저하게 구획된 신도시나 거대한 대형 복합 쇼핑몰에 들어섰을 때 묘한 답답함과 소외감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곳에는 우연한 마주침이나 거주자가 스스로 용도를 창조해 낼 여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해결책은 ‘열린 체계’와 미완성의 허용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가. 세넷은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강박을 버리고, ‘열린 체계(Open System)’의 도시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좋은 도시, 살아있는 공간은 건축가가 100%를 완성해서 내어주는 곳이 아니다. 70% 정도만 지어두고 나머지 30%의 허술함과 불확실성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공간의 쓰임새를 고민하고, 때로는 목적에 맞지 않게 변형도 해가며 진정한 자신들의 장소(시테)로 채워갈 수 있다. 무질서해 보이더라도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갈등을 조정하며 공간을 점유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곧 도시의 생명력이라는 것이다.

실천적 해법보다는 철학적 사유에 가까운 텍스트

제인 제이콥스가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에서 골목길을 걷는 보행자의 눈높이로 도시를 관찰했다면, 세넷의 책은 인문학과 역사, 철학을 거시적으로 넘나들며 조금 더 묵직한 학술적 담론을 제시한다. 고대 아테네 아고라부터 파리와 뉴욕의 사례가 쏟아지는 방대한 텍스트는 일반 독자에게 다소 버거운 진입장벽이 될 수 있다.

또한 당장 재건축 조합의 갈등이나 지자체의 예산 부족 현상에 써먹을 수 있는 명쾌한 정책적 가이드라인을 기대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실용적인 해답지라기보다는 인간과 공간의 관계를 묻는 철학서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남기는 통찰은 서늘할 정도로 정확하다. 아무리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 번듯한 건물을 ‘지어’ 놓더라도,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거대한 쓰레기에 불과하다. 아파트 단지 한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그 티 하우스처럼 말이다. 화려한 조감도와 부동산 논리에 매몰되어 우리가 잃어버린 ‘진짜 거주하는 방식’을 되찾고 싶다면, 리처드 세넷의 이 무거운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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